기억의 기억
외할아버지께서 위중하시다고 해서 인천까지 다녀왔다. 그것도 소식을 듣고 며칠이나 지나서 귀하디 귀한 걸음을 하셨다...... 중환자실에서 봰 할아버지는 다행히 의식을 찾으신 상태였다. 하지만 정신은 온전하지 못하셨다. 갑자기 말을 거신다.
"가세 가져와라, 가세가 안 들어, 한복 잘라야 하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한복이나 양장과 전혀 상관이 없으신 분이다. 78년 평생 쌓인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이고 시간과 공간을 무시한 채 입으로 기어 나오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내가 기억도 못하는 어린 시절을 외가댁에서 지냈다. 이모들이 날 업어 키워 주시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날 어르고 달래며 기르셨다. 둔해 보일 정도로 순했다던 나는 아버지, 어머니 없이 울지도 않고 잘 지냈다고 한다. 내 기억엔 없는 시절이지만 나에겐 은인 같은 분들이다.
그런 분들을 거의 10년만에 찾아뵀다. 그렇게 정신이 없으신 가운데도 외손주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 주신다.
"석희 왔구나"
혈관을 찾지 못해서 양쪽 팔엔 팔목부터 어깨까지 전부 주사바늘로 피멍이 들었고 목이 퉁퉁 부어서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눈에는 초점이 없다. 하시는 말씀의 1/10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중에 간신히 내 이름이 귀에 박혔을 뿐이다. 눈물이 왈칵 났다. 10년을 찾아뵙지도 못한 외손주의 얼굴이 이웃보다 낯설었을 텐데. 어린 시절 할아버지 품에서 응석부리던 외손주의 얼굴이 아직 나한테 남아있는 것일까.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내 모습은 그때 그 딱하고 어린 외손주의 얼굴일까.
감사하고 죄송스럽고 슬프고 안타깝다.
이모들이 나를 업고 있고 주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이미지가 딱 한 장 머리에 남아 있다. 이건 내 머리가 기억하는 실제 기억일까. 아니면 내 기억이 만들어낸 기억일까. 아무래도 좋다. 그 이미지 속의 난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표정이다.
따듯한 이모의 등 말고는 세상에 바랄 게 없는 표정이다.
웃는다.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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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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