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번역 작가로 산다는 것영상 번역 작가로 산다는 것
Posted at 2009/04/13 16:52 | Posted in 영상번역 이야기/영상번역?영상 번역 작가 지망생은 물론 보통 분들도 어떤 삶일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오늘은 영상 번역 작가의 삶을 시원하게 폭로(?)해 드리겠습니다.
영상 번역 작가는 그늘에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개봉관이든 TV든 외화가 끝나고 '번역 ㅇㅇㅇ'라고 뜨는 자막을 몇 분이나 보실까요? 외화나 다큐멘터리, 각종 쇼프로를 번역하는 작가들은 나름의 전문성을 지닌 전문가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엔 영상 번역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제 주위에는 이런 말을 하는 분도 계십니다.
'TV 나오는 번역은 방송국에서 직원이 하는 거 아니야?'
물론 아닙니다. 간단한 번역이나 짧막한 내용을 급히 할 때는 방송국 내부 인력을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번역 작가들이 직접 작업합니다. 대부분 집이나 작업실에서 개인이 작업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영상 번역 작가는 어떻게 작업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생활을 하는지는 외부에 그리 많이 노출되지 않습니다. 그늘에 가려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물론 특A급 작가들의 경우엔 그렇지 않죠. 책으로도 유명한 이미도 씨나 현재 왕성히 활동하시는 김은주 씨, 박지훈 씨, 홍주희 씨 등등. 이쪽 분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분들이지만 이미도 씨를 제외하고 나머지 작가 분들 이름을 이 글에서 처음 보는 분들도 생각보다 많을 겁니다. 그러니 조금 더 작은 영화를 작업하셨거나 케이블, 공중파에 나오는 작품을 번역하신 작가들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는 경우가 많겠죠.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지도 모릅니다. '난 이런 일을 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다'하고 세상에 소리를 치는 글인지도 모르겠군요.
한국의 영상 번역 단가는 굉장히 열악한 수준입니다. 혹자는 롯데리아 시급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거래처에 따라 단가의 차이는 큰 편이지만 평균 수준을 봤을 때 노동의 대가에 비해 굉장히 열악합니다. 작가들은 프리랜서가 겪어야 하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박한 단가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입문할 생각이 있는 분들은 환상을 버리고 조심스럽게 접근하시라는 말을 꼭 드리고 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영상 번역 작가의 하루를 시뮬레이션 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8시 기상
아침 식사 후 9시쯤 작업 시작
12시 점심 식사
6시까지 작업
7시 저녁 식사
아침 식사 후 9시쯤 작업 시작
12시 점심 식사
6시까지 작업
7시 저녁 식사
딱 이런 사이클로 하루에 40분 드라마 한 편을 뗄 수 있으면 아주 바람직한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 편 단가가 20만원 내외일 경우로 생각하겠습니다. 단가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무리해서라도 일을 더 해야겠죠. 사실 무리해서라도 일을 더 하는 게 대부분의 경우입니다. 위와 같은 경우가 바람직한 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저렇지 못합니다. 위 내용대로라면 9시간에 40분 드라마 한 편을 떼야 한다는 말인데 이 정도면 작업 속도가 굉장히 빠른 경우에 속합니다. 보통은 열댓 시간이 걸리는 게 대부분이죠. 다른 작가들에 비해 작업 속도가 떨어지면 더 빨리 기상을 하든지 더 늦게까지 작업을 하든지 단가가 더 높은 업체를 찾든지. 이렇게 세 가지 방법뿐입니다.
오후 12시에서 1시 사이에 기상
점심 식사후 작업 시작
8시에서 10시까지 작업
저녁 식사든 야식이든 대충 챙겨 먹음
밀린 일 때문에 새벽 3시 정도까지 다시 작업
새벽 4시쯤 취침
점심 식사후 작업 시작
8시에서 10시까지 작업
저녁 식사든 야식이든 대충 챙겨 먹음
밀린 일 때문에 새벽 3시 정도까지 다시 작업
새벽 4시쯤 취침
저 같은 경우는 이런 사이클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일정 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도 있지만 내려오는 일이 일정하지 않아서 한번에 확 몰렸다가 한 일주일 잠잠했다가 이런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프리랜서라고 하면 근무 시간이 자유롭고 원하는 만큼 일을 하고 원하는 만큼 쉴 수 있는 직업이란 인식이 강합니다. 하지만 이건 프리랜서와 전혀 관계없는 얘기 같습니다. 원칙적으로는 그렇게 해도 되긴 됩니다. 업체에서 일이 잔뜩 와도 한 2주 쉬겠다고 말하고 쉬면 됩니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일하겠다고 말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 다음엔 일이 안 옵니다. 이게 문제죠. 업체에서도 업체가 필요한 시기에 특정한 작가에게 필요한 양만큼의 일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가가 일을 거부하면 업체도 다른 작가를 찾고 이것저것 하느라 업무에 지장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일이 지속되다 보면 그 작가를 쓰지 않는 일이 생기죠. 그러면 작가는 일감이 떨어지는 겁니다. 결국 작가는 마음대로 일을 받고 마음대로 작업하는 여유 따윈 가질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다른 프리랜서들도 이 경우와 아주 비슷할 것 같다고 봅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한 며칠 바른 생활로 작업을 하다가도 갑자기 바쁜 일들이 몰아닥치면 그동안 지켜온 생활 패턴이 순식간에 깨져 버립니다.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가려면 일이 있는데도 무시하고 잠을 자 버리든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게 불가능하죠.
영상 번역 작가들이 겪는 딜레마는 이런 불규칙한 작업량에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의 작업 시간은 대부분 오후 시간인데 직장인들은 늦은 오후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거나 약속을 잡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약속에 나가기가 쉽지 않죠. 한번 나갔다 오면 또 패턴이 다 깨져 버릴 테니까요. 그래서 영상 번역 작가를 하면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너 진짜 바쁜 척 한다' 이 말입니다. 누군 좋아서 바쁜 척 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조금만 소홀해도 주위 인간 관계를 다 망쳐 버리기 십상입니다. 이 점은 개인이 주의를 해야겠죠.
요즘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평균 퇴직 연령이라고 합니다. 프리랜서로 언제까지 일할 수 있겠다... 하고 장담할 순 없지만 최소한 저 나이까지는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일할 땐 몇 달을 한 달 수입 20~30만원으로 지냈습니다. 고작 수입 100만원이 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실력 탓도 있고 작업 속도가 심각하게 느렸던 까닭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력을 쌓아서 적당한 거래처와 꾸준한 일감만 유지하면 직장인들 연봉을 따져도 영상 번역 작가는 중상 이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꼭 프리랜서라고 해서 직장인보다 불안하거나 어려운 직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프리랜서를 반백수로 보는 경향이 강하죠. 주위 어르신들이 걱정을 하신다거나 친구들이 비웃음을 던진다거나 하는 터무니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이러이러하다고 상황을 설명하기는 굉장히 구차하죠. 전에는 저도 꽤 많이 발끈하고 했는데 요즘엔 그냥 웃고 맙니다. 대꾸하기도 지쳤다고 할까요. 주위에서 하는 말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영상 번역을 포기하고 직장에 들어가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명절마다 결혼하라고 압박하는 친지들 때문에 별 마음에 안 들어도 대충 무던한 결혼 상대를 구해 결혼해 버리는 케이스라고 할까요. 물론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른 더 좋은 길을 찾아서 떠나시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이 부분이 영상 번역 작가들에겐 엄청난 딜레마로 다가옵니다. 저도 번역 1년차엔 면접을 봤던 경험도 있습니다.
영상 번역 작가는 하루 시간의 3/4 이상을 의자에서 보냅니다. 매시간마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가끔씩 산책을 하고... 이런 관리를 해 주지 않으면 젊은 나이에도 요통을 앓기 십상입니다. 당장 일이 급해서 일을 하다 보면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아서 위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스트레스도 많고 온갖 지식을 다 짜내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체력도 쉽게 고갈됩니다. `앉아서 하는 일이 뭐가 힘들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꼭 건설 현장에 나가 들짐을 들어야 힘든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몇 주간 이어지는 강행군 끝에 의자에서 일어날 때면 허리가 아프고 허기도 지고 욕실 거울을 보면 제 얼굴이 딱해 보일 때도 많습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들죠.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이런 몹쓸 짓을 하면서 살고 있나'하고 말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해서 하는 일인데도 몹쓸 짓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란 말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영상 번역 작가들은 '작가'라는 호칭답게 아주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주위 번역 작가들과 자신을 비교해서 쉽게 낙심하기도 하고 슬럼프도 자주 오고 주위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할 때도 많습니다. 어느 곳이든 경쟁은 있는 거지만 당장 다른 작가의 수입이나 현재 근황을 봤을 땐 더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에 자괴감을 느끼는 일이 많습니다. 업체에서 오는 일감이 뜸하거나 당장 일이 없을 때도 심각하게 초조해 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 업계에서 나름 인정을 받고 계신 40대 작가 분도 아직 이런 초조함을 느끼신다고 하니 이런 부감은 평생 지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된다'라고 툭툭 털고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작가는 정말 훌륭한 거죠. 보통은 한 동안 우울해 하거나 작업에 지장을 받거나 잠을 잘 수도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까칠하다', '성격 안 좋다' 등등의 소리를 듣기도 쉽죠. 사실 꼭 그런 사람은 아닌데 말입니다.
영상 번역 작가는 자긍심 하나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누가 뭐래도 '작가'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 하는 작품들을 작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전까지는 케이블 방송에서도 '번역 ㅇㅇㅇ'이란 자막을 내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요즘엔 거의 자막을 띄워 주더군요. 아무리 힘들게 작업하고 지치던 작품이라도 제 이름 석자가 자막에 뜨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습니다. `번역 좋더라'라는 말도 작가들에겐 최고의 칭찬입니다. 그 한 문장, 한 단어를 떠올리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본인만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행여나 채널 게시판에 누구 번역이 엉망이네 개판이네 하는 말은 자제하셨으면 합니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작업한 거니까요. 그리고 가끔 TV나 극장에서 번역 작가 이름이 뜨면 반드시 기억하는 건 아니라도 '저런 사람이 번역한 작품이구나...'하고 지나가면서라도 생각해 주셨으면 꽤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점심이나 저녁, 혹은 밤 늦게 야식을 먹으며 TV를 켜면 제가 주로 작업하는 채널을 봅니다. 기껏해야 한 20분이나 볼라나. 그래도 자기가 작업한 내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으면 기분이 참 이상합니다. 신기하기도 하고요. 주로 작업하고 있는 채널들이기 때문에 밥 먹을 때 틀어 놓으면 한 이틀 걸러 하루 꼴로 제가 했던 영화나 드라마가 나옵니다. 제가 번역 생활 처음으로 작업한 영화는 MBC무비 채널에서 했던 '쉐이드'라는 작품입니다. 한참 전 일이었지만 있는지도 몰랐던 채널의 편성표를 뒤져서 제가 작업한 영화를 봤답니다. 뻔한 영화고 재미도 없었고 자막에 제 이름이 떴던 것도 아니지만 얼마나 뿌듯하고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그때 기분이 생생하네요.
힘들고 지겹고 지칠 때도 많지만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열악한 환경에도 굳이 굳이 이 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건강은 엉망이고 생활 패턴도 엉망이고 성격은 까다롭고 수입도 불안정하고 몰골도 안스러워지고... 등등등등등등등등등. 지금껏 글에 쓴 것처럼 자기 관리가 쉽지 않은 직업입니다. 그래도 영상 번역이 하고 싶은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일을 하다 보면 이 일이 천직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의 보람과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일이고요. 부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뛰어드신다거나 무모하게 진입하시는 건 재고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개봉관에 제 이름 석자를 거는 게 꿈입니다. 35살까지는 어떻게든 내 이름을 걸겠다...하고 스스로 약속도 했고요. 한번만 걸려도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한번이 아니라 아주 자주 걸리면 좋겠죠. ^^ 그나마 꿈이 있어서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작업하는 하루하루가 훈련이고 연습입니다.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 군대엔 이런 구호가 있죠? 물론 지금 하는 일도 실전이지만 제겐 실전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일에 치어 번역 질에 소홀할 때면 화도 나고 제 자막이지만 보기도 싫고 할 때가 많습니다. 어쨌든 제 꿈과 전혀 관련 없는 노력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도 저린 허리를 두드리면서 자리에 앉아 일을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달립니다. 그늘에 있는 사람이지만 언젠가는 여러 사람들이 기억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영상 번역 작가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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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알바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오래 가는 블로그 2009/04/14 09:28 [Delete]

존함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화이팅하세요!! ^^ 황석희님!
직업적으로 번역하시는 분은 역시 포스가 남다르시군요 +_+!
공감되는 내용도 있지만 사실 저와 같은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고충들도 많네요 T_T...
존경스럽습니다!!